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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to English: “Comfort women” as victims of Japan’s state-run rape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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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text - Korean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한겨레 21 / 제556호 / 2005-04-20

한-일 수구파들의 공동 ‘성폭행’
군위안부는 역사에 유례없는 ‘제도적 강간’…망언으로 피해자를 두번 죽이는 자들이여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처음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다고 ‘국내’ 최초로 커밍아웃한 직후에 란 드라마가 방영됐다. 일본군 ‘위안부’가 돼버린 주인공 여옥의 불행한 운명에 온 나라가 눈물을 흘리고 분노했다. 그리고 드라마는 끝났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그 이전 40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2004년 2월 ‘종군위안부 누드화보’ 사건이 터지자 또다시 한국 사회는 끓어넘쳤다. 끓어넘친 물이 불을 끈 것일까? 그 여배우가 할머니들의 쉼터인 ‘나눔의 집’을 찾아와 사죄하고 한달쯤 지난 뒤 학생들과 함께 그곳을 찾았다. “요즘 어때요?”라는 내 말에 안신권 사무국장은 “딱 일주일이더라고요”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일본대사관 앞에서는 이제 13년이 된 ‘수요시위’가 650회를 넘겨 진행 중이다.
김두한도 정신대였다? 용어정리합시다
그리고 2005년 들어 한승조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제기하는 할머니들과 진실규명운동에 대해 “성의 문제”를 “왜 돈의 문제와 결부해서 자기 망신을 계속하느냐”며 “사악함과 어리석음의 대표적인 사례”이자 “수준 이하의 좌파적 심성”이라고 망언을 내뱉었다. 그러더니 일본의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라는 단체의 부회장인 후지오카 노부카쓰는 수요시위에 나오는 할머니들이 북한 공작원이라고 주장했다. 한승조 망언 당시 한승조 일병 구하기에 나섰던 그 지만원은 후지오카의 망언을 발전시켜 수요시위 등에 참여하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가짜’라는 의문이 든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1944년 당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여성이라면 현재 최소한 78살 이상의 고령으로 건강이 너무 상해 거동이 불편할 것”이라며 “최근 TV에 보이는 위안부 할머니들은 건강도 좋아 보이고 목소리에도 활기가 있는 분이 많다”는 것이다. 이어 그는 “대한민국이 부끄럽다. 위안부 놀음, 이제는 접어라”라며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와 나눔의 집이 “몇명 안 되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앵벌이로 삼아 국제 망신을 시키고 다닌다”라고 비난했다. 지만원의 주장은 그동안 한-일을 넘나들며 나온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망언의 결정판이라 할 만하다.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들은 누구일까?
일본군 ‘위안부’ 또는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먼저 용어 문제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 이 문제를 지칭하는 용어로 가장 먼저 쓰인 말은 ‘정신대’(挺身隊)다. 그런데 정신대에는 일본군에 끌려가 성노예로 착취당한 분들도 포함되지만, 공장에 끌려가 강제 노동에 시달린 여성들뿐 아니라 남자도 포함될 수 있다. 한 예로 김두한은 일제 말기에 반도의용정신대의 부단장을 지냈다. 요컨대 정신대란 말은 일본군 ‘위안부’를 포함하고 있지만, 훨씬 범위가 넓은 집단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정대협이나 정신대연구소 같은 단체들은 굳이 단체 이름을 바꾸진 않았지만, 일본군 ‘위안부’만을 가리킬 때는 정신대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위안부란 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여기서 ‘위안’이 누구의 위안이냐는 점이다. 일본군의 성욕 발산은 일본군 입장에서 위안이었을지 몰라도 피해자인 여성들 입장에서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던 것이다. 위안부는 당연히 일본군 입장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일본군 ‘위안부’란 말에는 좀 번거롭기는 해도 꼭 작은따옴표를 붙여서 쓴다. 일본에서 널리 쓰이고 있고, 또 한때 북에서도 사용했던 용어가 ‘종군위안부’이다. 이 말은 위안부란 말의 문제점을 그대로 갖고 있는데다 ‘종군’이란 표현을 통해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 종군작가, 종군기자, 종군화가 등은 누구에게 억지로 끌려간 사람들이 아니라 제 발로 군대를 따라간 사람들이다.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도 스스로 한 것이지 누가 억지로 시켜서 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일본군 성노예는 작은따옴표를 쳐도 잘 지워지지 않는 위안부란 용어의 문제점을 없앤 말로 연구자들이나 활동가들 사이에 최근 들어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는 용어다. 그러나 당사자인 할머니들께서 이 말을 좋아하시지는 않는 것 같다.
매독으로 인한 전투력 손실 막으려 했다
Prevent the spread of syphilis, prevent the loss of military power
일본의 극우파나 한국의 친일·수구 세력은 왜 일본만 갖고 난리냐는 투로 이야기한다. 한 예로 한승조는 “전쟁 중에 군인들이 여성들을 성적 위안물로 이용하는 것은 일본만의 일이 아니다”라고 강변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의 참화 앞에서 여성들이 총칼 든 사람들의 성적 만행의 대상이 됐다는 점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불행한 역사가 대일본제국이 저지른 역사적 범죄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다. ‘제도’로서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모든 전쟁에서 발생하는 전시 강간과는 차원이 다르다. 일본군 ‘위안부’란 일본 국가기구의 주도에 의해 식민지·피점령지 여성을 동원하여 군인들에게 성적 노예로 공급한 제도적인 강간이며, 이는 명백한 전쟁범죄로서 파시즘과 결합한 성폭력이었다.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시기의 일본처럼 국가의 조직적 개입 아래 군인들을 위해 ‘성적 노예’를 끌고 다니고 성적 노예의 공급을 위해 제도화된 강제 동원을 일삼은 예는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다.
일본군 위안소가 최초로 설치된 것은 1932년 ‘상해사변’ 전후의 일로 알려졌다. 상하이를 점령한 일본군 지휘부는 병사들의 강간 사건이 빈발하자, 일본 본토에서 위안부를 데려오기 시작했다. 당시 상해파견군 참모장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 중장은 위안부가 파송돼온 뒤 강간 사건이 줄어들어 기뻐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김완섭 같은 현대판 친일파는 “해외 원정군에 위안부를 딸려 보내 군인과 현지 주민을 배려”한 것은 “세계 전쟁사에 유례가 없는 독창적인 발상”으로 “일본군의 휴머니즘을 상징하는 증거”라고 일본 극우파도 차마 입에 담지 못하는 억지를 부리기도 한다.
일본군이 ‘위안부’ 제도를 도입한 이유는 단순히 강간을 방지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20세기 일본 군부의 ‘총력전’ 사상에 따른 전략적 사고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제국 일본은 러시아 내전에 백군 편에 서서 개입하여 7만5천명의 대병력을 시베리아에 파견했다. 그런데 이 당시 일본군에게 큰 병력 손실을 입힌 것은 적군이나 게릴라들의 공격보다도 시베리아 매독의 공격이었다. 일본군은 이 당시 전투로 인한 병력 손실보다 성병으로 인한 전투력의 손실이 더 컸던 것이다. 매독이 도져서 보행 능력을 상실할 경우, 그냥 버리고 갈 수도 없어 성한 병사 2∼4명이 붙어 들것에 싣고 가야 하니 실제 전투력 손실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성병에 의한 피해는 전투력의 15∼20%에 해당할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에 가담한 일본의 군부는 한편으로는 유럽에서 연합국의 승리를 바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군이 모델로 삼았던 독일군(프러시아군)이 얼마나 잘 싸우는지를 주시했다. 그러나 독일군의 패배는 일본군에는 차라리 충격이었다. 근대의 전쟁은 이제 군대만 강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국가의 총체적이고 장기적인 전쟁수행 능력이 승패를 결정하는 총력전이 된 것이다. 국가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절대절명의 과제로 등장한 것이다. 주변국과 평화롭게 지내기에 일본은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다. 그러나 이웃 중국이나 소련을 정복하기에, 그리고 궁극적으로 미국과 벌이게 될 ‘세계 최종전’에서 승리하기에 일본은 너무나 작은 나라였다. 인적·물적 자원이 부족한 일본이 세계제국 건설의 야망 속에 제국주의 전쟁을 일으키자, 군부는 부족한 자원을 총동원하여 군사력의 극대화를 이뤄야 했다. 만약 러일전쟁 때나 시베리아 출병 당시 일본군의 큰 문제로 대두된 성병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일본은 병력 동원 면에서 15∼20%의 증대 효과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일본군과 제국일본이라는 국가는 일반 병사 개개인에 의한 강간과 약탈을 국가가 묵인, 방조하는 선을 넘어서 국가가 조직적으로 “깨끗한 성”을 보급하는 ‘관리매춘제도’를 구상하게 된 것이다. 분명 ‘깨끗한 성’을 공급하여 성병을 예방할 수 있다면 전투력의 향상에 크게 기여할 것이고, 이는 세계대전을 치르기에 인적 자원이 부족한 일본에 큰 도움을 주는 ‘효율적’인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라. 특히 효율성을 종교처럼 숭상하는 ‘합리적’인 신자유주의자들이여, 효율성이 인간의 얼굴을 잃어버릴 때 어떤 모습을 띠게 되는지를!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2차 세계대전 직후에 바로 처리되지 못한 데에는 미국의 책임도 크다. 여러 가지 악독한 인체실험을 한 일본군 731부대 문제를 미국이 덮어버린 것처럼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미국이 덮어버렸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지금 보면 엄청난 전쟁범죄, 반인륜 범죄이지만 당시 미국에는 그렇지 않았다. 미군의 심리전 당국이 일본군 패전 지역에서 생존한 일본군 ‘위안부’들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수집했지만, 이 문제는 일본 전범을 단죄한 동경재판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100% 덮어진 것은 또 아니다.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네덜란드 출신 등 백인 여성들을 강제로 ‘위안부’로 삼은 일본군들은 전후에 전범으로 처벌됐다. 이는 미국 등 연합국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엄청난 전쟁범죄임을 명백히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들 입장에서 볼 때 백인 피해자의 인권과 조선인 등 아시아인 피해자의 인권이 같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인권은 보편성이란 머나먼 훗날을 기약해야 할 사치스러운 생각이었다. 다만, 그 당시 미군이 모아놓은 자료가 현재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의 진상을 밝히는 데 요긴한 자료로 쓰이게 된 것을 차라리 고맙게 여겨야 할까?

박정희도 베트남 파병 때 ‘위안부’ 생각
한국 사회에서는 친일이나 민간인 학살 문제가 지난 수십년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묻혀 있었듯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1990년대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동년배인 윤정옥·이효재 교수 등과 1970·80년대 학생운동의 영향 속에서 성장한 연구자들이 1987년 6월항쟁을 전후한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이 문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너무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이른 때였는지 모른다. 한편 일본의 양심세력들도 과거 일본이 행한 잘못에 대해 반성하면서 과거와 직면하기 시작했다.
민족 문제로만 볼 수는 없다
그렇지만 벽은 높았다. 모진 고생 끝에 살아 돌아온 피해 여성들을 한국 사회는 따뜻하게 맞아주지 않았다. 병자호란 때 청에 끌려갔다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들을 ‘환향녀’(還鄕女)이라 불렀는데, ‘화냥년’이란 말이 여기서 나왔다는 것이 아닌가?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것은 차라리 죄였다. 그런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몸을 더럽힌 여인들은 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더구나 끌려간 여성들의 대부분은 배우지 못한 가난한 농민의 딸이었다. 꼭 유교 이데올로기가 아니었더라도 한국 사회의 계급구조 속에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는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는 여성 문제를 축으로 하면서도 민족 문제와 복잡하게 얽혀 있고, 계급·인권 문제, 국가와 민주주의 문제 등이 바닥에 깔려 있다. 한국 사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한순간 폭발했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잊혀지는 것은 이 복잡한 문제에서 오로지 민족 문제만 대중적으로 부각됐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민족 문제만이 부각된다는 것은 좀 단순화해 설명하면 “일본놈들이 조선 여자를 군위안부로 끌고 갔다”는 사실에서 ‘일본’과 ‘조선’에만 방점이 찍한 경우를 말한다. 물론 민족 문제는 아주 중요하다. 특히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여성이 모두 적게는 8만, 많게는 20만명으로 추정되는데, 그 중 80%가 조선 여자였다는 점만으로도 민족 문제를 제쳐두고 여성 문제의 프리즘만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볼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 사이의 민족 문제가 과도하게 부각될 경우, 다른 민족 소속의 피해 여성 문제가 설 자리가 없어지게 된다.
더 심각한 것은 민족 문제가 과도하게 부각될 경우, 우리 민족 내부의 성(젠더)이나 인권 문제가 사라진다는 점이다. ‘일본’놈만을 탓할 경우 “한국 남자들은 어땠는데?”라는 질문을 피할 길이 없다는 점이다. 일제의 잔재를 전혀 청산하지 못한 우리가 전쟁범죄를 청소하다가 말아버린 (비록 미국에 의한 것이지만) 일본에 대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로 손가락질만 할 처지는 아니다. 우리 민족의 탈을 쓴 친일파들의 허물이 일본이 전쟁범죄에 면죄부를 주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우리가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해방 이후의 몇 장면을 되살려보자. 일본군·만주군 출신이 득세한 한국군은 한국전쟁 당시 일본군 ‘위안부’같이 대규모는 아니었다 해도 이른바 ‘모포부대’를 운영한 흔적이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이 문제를 회고록에 적었던 모 장군은 한동안 선후배들에게 시달렸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한-일협정 체결 당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며 박정희 등의 역사의식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분노한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박정희를 너무 높이 평가해주셨다. 한-일협정과 동전의 앞뒷면 관계에 있는 베트남 파병에서 박정희는 한국군이 해외로 출병하는 데 전투력 고양을 위해서는 ‘위안부’를 딸려 보내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참모들과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멀리 남양의 전장에 가면 언제 돌아올지 몰랐던 일본군과는 달리 한국군은 1년 주기로 병사들이 교체된다는 점, 그리고 만약 ‘위안부’를 보냈을 경우 야기될 국제적 조롱과 김일성이 펄펄 뛸 것 등이 고려돼 천만다행으로 ‘위안부’를 안 보내는 것으로 결론이 났지만, 참으로 아찔한 순간이었다.
한-일 극우파, 위기 맞자 내선일체형 연대
일본군·만주군에서의 교육과 복무 경험을 통해 박정희의 머릿속에는 전투력 향상을 위한 ‘국가관리 매춘’이라는 구상이 꽉 박혀버린 것 같았다. 1970년대 초반 박정희는 기지촌정화운동을 통해 주한미군에게 ‘깨끗한 성’을 공급했다. 기지촌정화운동의 주무부서는 경기도도 보건사회부도 내무부도 아니고, 하필이면 외무부였다. 미군을 상대하는 기지촌 여성들에게는 청와대 비서관 등 고위관리들이 나와 안보역군으로 치켜세웠고, 일본인 관광객을 상대하는 ‘기생관광’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외화벌이의 전선에 나선 산업전사가 됐다. 왜 해방 직후 친일파 청산이 필요했으며, 오늘날 친일 잔재 청산과 군사독재 잔재 청산이 별개일 수 없는 이유도 이런 쓸쓸한 장면에 잘 나타난다.
한승조·지만원 등의 부류는 지금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성을 혁명의 무기-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 터지자 군사독재 정권이 했던 말인데, 한승조가 되풀이하고 있다- 로 삼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승조·지만원을 비롯해 국내에서 요즘 친일 망언을 일삼는 사람들, 그들이 궁극적으로 지키려는 것은 국가보안법으로 대표되는 ‘수구질서’다. 이 질서가 안전하게 지탱되던 시절에는 이렇게 그들의 정체가 노출될 일도 없었다. 그러나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국가보안법에 의해 지탱되던 수구질서가 위기에 몰리게 됐고, 또 한국의 민주화는 일본 극우세력에게도 위기감으로 작용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일본의 극우파와 한국의 친일·수구 세력간에 자학사관 비판에 기초한 내선일체형 한-일 연대가 공고해지는 셈이다.
Translation - English
Anti-comfort women campaigners verbally raping the victims again

“Comfort women” as victims of Japan’s state-run rape system


In 1991, right after Kim Haksun became the first person who claimed to be a victim of Japan’s war-time sexual slavery, or so-called “comfort woman,” the MBC drama “Eyes of Dawn” started airing. The whole nation raged and cried over the fate of the heroine, Kim Yeo-ok, who was forced to serve as a comfort woman in a Japanese military brothel. But the drama ended, and the spotlight on the “comfort women” issue was also turned off, as it had been for the past four decades. In February 2004, Korean society was inflamed with rage again when a comfort woman-themed nude pictorial was published. Might it be that the flame incinerated the anger, too? Now a month has passed after the actress who shot the photos visited the House of Sharing, a shelter for the victims, to apologize. When asked, “How’s everything going?” An Sin-kwon, the secretary general sighed and said, “The attention didn’t last more than a week.” For the past thirteen years, a weekly demonstration calling for Japan’s full apology has taken place every Wednesday in front of the Japanese embassy, and there have been more than 650 gatherings so far.
Comfort women? Volunteer Corps? What is the right term?
In 2005, Han Seung-jo, then Professor Emeritus of the Department of Political Science and Diplomacy at Korea University, ludicrously argued that victims of Japan’s sexual enslavement and protesters calling for Japan’s atonement were “a disgrace to the nation” as “they are exploiting sex to earn money,” He called them evil, foolish and pathetically leftist minds. Meanwhile, Fujioka Nobukatsu, deputy president of the so-called Japanese Society for History Textbook Reform, claimed that those victims participating in Wednesday demonstrations were spies from North Korea. Also Ji Man-won, a military expert dedicated to “saving Private Han,” who was under heavy attack by critics, raised the possibility of those victims being a bunch of elderly frauds, echoing Nobukatsu’s absurd statement.
He argued that the real victims of Japan’s sexual enslavement that occurred in 1944 should be more than 78 years old, and therefore, they would be too weak to stand on their own feet, in contrast to those self-claimed victims on TV, who looked in good health and had strong voices. He said, “It is a disgrace to the nation. Now it’s time to stop the comfort woman play,” and also denounced the Korean Council for the Women Drafted for 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 and the House of Sharing, saying that they shamed the whole nation by parading a handful of elderly beggars for money. His argument was the worst among similar sex slave-related statements released in both Korea and Japan. But who are the ones really shaming the country?
Before we look into the issue, we need to look at the terms used for the victims first. While terms like “sex slaves” or “comfort women” are commonly used these days, the victims previously were referred to as “volunteer corps.” This term was used not only for victims of sexual slavery but also victims who were forced to work in factories. Also it can be used for male victims and those who really volunteered for service. A case in point is Kim Du-han, leader of the Jongno street gang who served in the Joseon Courageous Volunteer Corps as vice commander during the late Japanese colonial period. In a nutshell, the term “volunteer corps” can be used in a broader context. For this reason, major Korean activist groups whose names include the term do not use it in case they specifically refer to the victims of Japan’s sexual enslavement.
Now, looking at the term “comfort women,” one might find it preposterous that the word “comfort” is used in this context. The fulfillment of sexual desire might have been a comfort for the Japanese army, but no more than extreme pain for the victims. As it simply reflects the view of the imperial Japanese army, we make sure to use double quotation marks for the Korean term of “comfort women.” The victims are also called “military comfort women,” a term widely used in Japan, and also in North Korea for a short time. While the term “comfort women” is already problematic, adding the word “military” made it even more delusive. Because people like military writers, military correspondents, and military painters are those who voluntarily followed the army. The decision to become a military commoner is also made following one’s own will, as Admiral Yi Sunsin did before Japanese invasions of Korea (1592–98). Now, the use of the term “sex slaves” is spreading among scholars and activists, as simply adding double quotation marks is not enough to eliminate the evil implied in the term “comfort women.” But unfortunately, those victims of sexual enslavement do not seem to like the term “sex slaves.”
Prevent the spread of syphilis, prevent the loss of military power
The Japanese far right and pro-Japanese conservatists in Korea raise their voices, arguing why Japan should be the only target of criticism. Han Seung-jo once claimed that Japan was not the only country that exploited women to provide sexual solace to soldiers during war. True, in war time, female civilians of all countries suffered sexual brutalities perpetrated by soldiers. However, this is no excuse for Japan’s wrongdoings during its colonial rule. Japan’s sexual enslavement of Korean women is different from wartime rape. Rather, it can be defined as a state-run rape “system,” in which the Japanese government mobilized women of colonies or occupied countries and provided them as sex slaves to Japanese soldiers. This is in every way a serious war crime, a manifestation of fascism combined with sexual violence. No such case exists throughout human history as that of Japan during the Sino-Japanese War and the Pacific War, in which the government built a system for mobilization, provision, and relocation of sex slaves for soldiers.
Japanese military comfort brothels are known to have been established first in 1932, around the time of the Shanghai Incident. Faced with rising rape crimes committed by soldiers, the Japanese military command started supplying the army with prostitutes from mainland Japan. General Okamura Yasuji, then vice chief-of-staff of the Shanghai Expeditionary Army, is said to have been satisfied to see the number of rape crimes decreasing. This served as grounds for Kim Wan-seop, a pro-Japanese writer, to argue that sending prostitutes to the expeditionary army was a remarkably creative policy that was unprecedented throughout the world’s war history, because it “provided comfort not only to Japanese soldiers, but also female civilians in occupied countries, which is evidence of the humanist side of the Japanese army” — an utterance that even Japan’s far right groups would hesitate to make.
The adoption of a state-run prostitution system was not just aimed at curving rape crimes committed by soldiers. It was rather a tactical approach in line with the total war strategy that the Japanese military pursued in the 20th century. When the Russian civil war broke out in the aftermath of the Russian Revolution of 1917, Imperial Japan intervened in the war by deploying a large army of 75,000 soldiers to Siberia to fight on the side of the White Army. The biggest threat to the Japanese army was not the attack of the enemy or their guerrillas, but the spread of Siberian syphilis. The sexual disease caused a greater loss of military power than actual battles. When a soldier with syphilis became unable to walk, a group of two to four soldiers had to march together carrying him on a stretcher. At the time, the damage caused by the disease was enormous, crippling up to 15 to 20 percent of the Japanese military force.
Fighting as a member of the Allies during World War I, the Japanese military wanted victory, of course, but it also paid close attention to the performance of the German army (the Prussian army), its military role model. Therefore, the defeat of the German army came as a shock to the Japanese military. The result taught them a lesson that, in modern welfare, it is more crucial to enhance the nation’s ability to fight a total war, in which nations make an all-out effort to fight for a prolonged period, than to strengthen the military force itself. Now the full mobilization of all possible resources within the nation’s territory became the only factor to win a war. The country might not be too small to the Japanese, if they were to maintain a peaceful relationship with neighbors. But for those who aspired to conquer giant neighbors like China or Russia, and in the end, to win the final battle against the U.S., its territory was too small. So the nation with limited human and material resources waged an ambitious war to build a global Japanese empire, and its top priority was to ensure the maximization of military power. They assumed that the prevention of syphilis, which had damaged its military power to a large degree during the Russo–Japanese War and the Russian civil war, would have the same effect as increasing the size of the army by 15 to 20 percent. This explains why the Japanese government and the Japanese army took a step further from overlooking war-time sex crimes committed by individual soldiers, to devising a state-run prostitution system aimed at systematically providing “hygienic sex.” For the resource-stricken nation fighting the world war, the supply of “hygienic sex” would be an efficient way of not only preventing syphilis but also increasing its military power. But do keep in mind, all you “rational” advocates of neoliberalism, the worshippers of economic efficiency — how monstrous the consequences can be, when humanity is lost in the quest for efficiency.
The U.S. government is largely to blame for not dealing with the issue of Japan’s sexual slavery as soon as the war ended. In the same way as it glossed over the Japan’s heinous lethal human experimentation committed by Unit 731, it turned a blind eye on the comfort women issue. Although it is now regarded as one of the most inhumane, terrifying war crimes, at the time things were different in the eyes of the U.S. government. For all the detailed U.S. investigation of the victims who survived in the colonies after the war, the issue was not addressed when Japanese war criminals were punished in the Tokyo war tribunal. But this does not mean that it has not been tackled at all. The sexual enslavement of white women, Dutch women in Indonesia, for example, was punished after the war. The Allies including the U.S. clearly perceived it as a serious war crime, but the human rights of Asian victims, in their point of view, did not deserve the same attention paid to that of white victims. The idea of human rights based on equality was too much to hope for, something belonging to a distant future. The only consolation — or thing to be thankful for — might be that the result of the investigation is now used as evidence showing that the victims were not voluntary but forced to become sex slaves.
Issues like pro-Japanese collaboration or civilian massacres remained unaddressed for the past decades. Likewise, the comfort women issue did not come under the spotlight till the 1990s, when scholars began looking into it in earnest around the time of the 1987 June Democracy Movement. Among them were Yoon Jeong-ok and Lee Hyo-jae, professors at Ehwa Woman’s University and also around the same age as the victims, and scholars who were affected by the student democracy movement in the 1970s and 1980s. The best time to start something might be when you think it is too late. The issue also came to light in Japan, as some sensible Japanese historians began soul-searching, looking back on Japan’s past wrongs.
The issue is not a simple matter of Korea vs. Japan
The wall of prejudice was high. Korean society did not embrace those victims who survived all sorts of atrocities. After the Qing invasion of Joseon (1636), female returnees who had been abducted to the Qing Dynasty to serve as slaves were called hwanyang-nyeo (female returnee), which is the origin of the Korean slang, hwanyang-nyeon, meaning a “whore.” Their return as survivors amounted to a sin. Those “flawed” women could not make their voice heard in the patriarchal society. Furthermore, most were daughters of poor farmers. Oppressed by the traditional class system and the Confucian ideology, they were unable to speak out.
The comfort women issue is not a simple problem. While the violation of women’s rights is at its center, it can also be viewed as a matter between the two nations, or more broadly, a violation of human rights perpetrated in the class system or by a fascist nation. The issue routinely has drawn enormous attention only to be forgotten, because the focus might have been only on the conflict between the two nations. In other words, while it is true to say, “the Japanese abducted Korean women to force them to serve as military comfort women,” the spotlight has been only on the words “Japanese” and “Korean.” Of course, seeing the issue as a matter between the two nations is very important. Among the total number of 80,000 to 200,000 victims, 80 percent were Koreans, proving that the issue should not be viewed simply as a violation of women’s rights. However, if we insist on shaping it as a matter of Korea vs. Japan, victims of other nations are unnecessarily pushed out of the discussion.
Dictator Park also thought of shipping prostitutes to Vietnam
More importantly, the excessive focus on two conflicting nations could dilute the significance of human rights violations perpetrated in this country. If the Japanese are to blame, the question goes, what about Koreans? Korea, still living with the vestiges of Japanese colonial rule, has no right to criticize Japan for not completely dealing with its wartime crimes (the effort was made somehow, thanks to the influence of the US government). This is not to say, however, that Japan’s wrongs during the war can be justified by the ill behavior of the pro-Japanese groups in Korea. With this fact in mind, let’s go back to some historical scenes after the nation’s liberation in 1945 that we should always remember. During the Korean War (1950-1953), the command of the Korean army, who had served in the Japanese army before, also ran “armies of prostitutes” carrying blankets all the time — though the size was no match for that of Japan — and left their marks here and there in the history. A general who wrote about this in his memoir is said to have been condemned by his fellow soldiers for his revelation.
Some express anger at the way Park Chung-hee, the military dictator, perceived the history, citing that the comfort women issue was not even put on the table in the negotiation of the Treaty on Basic Relations between Japan and the Republic of Korea (1965). Nothing is wrong with their anger, but the problem is their overestimation of Park Chung-hee. Sending troops to join in the Vietnam War, an economic return for signing on the treaty with Japan, the dictatorial leadership mulled over sending prostitutes with them too as a way to raise the spirit of the soldiers. Fortunately, the idea was dismissed considering the fact that, unlike the Japanese army headed to the South Seas for a long war, the Korean soldiers would serve no longer than a year, and the resulting consequences of being ridiculed in the international community and infuriating Kim Il-sung, then leader of North Korea. It surely was a devastating moment in history.
Korean and Japanese far rights collude together in emergency
With his knowledge gained from the experience of serving in the Imperial Japanese Army and the Manchukuo Imperial Army, the dictator Park’s head was full of plans to build a state-run prostitution system that might help improve military power. In the early 1970s, he initiated a campaign for “purifying” brothels and prostitutes working in the gijichon, U.S. military camp towns, in effort to provide “hygienic sex” to the U.S. Army stationed in Korea. The authority in charge of the campaign was not the Gyeonggi-do government, or the Ministry of Health and Welfare, but, strangely enough, the Ministry of Foreign Affairs. High-ranking government officials like presidential office staff visited the gijichon to praise those prostitutes serving the U.S. army for being guardians of national security, and those who worked in the sex tourism industry targetting the Japanese were called industrial soldiers earning dollars. These bitter scenes explain why it was necessary to wipe out pro-Japanese groups after the nation’s liberation in 1945, and why punishing the pro-Japanese is inseparable from punishing the military dictatorship.
People like Han Seoung-jo and Ji Man-won argue that raising the comfort women issue now is like weaponizing sex for a communist revolution — repeating the old statement of the dictatorial leadership released in 1986 when they encountered social outrage against the sexual harassment of a female human rights activist committed by a Bucheon police officer. What those people are trying to protect by saying foolish pro-Japanese statements is their conservatist order, which is typically represented by the National Security Act. In those days when everything was under the conservatist order, they did not have to expose who they were. But the nation’s ongoing democratization has not only shaken their firm foundation supported by the anti-communist law, but also posed a threat to Japanese far-right groups. So the collusion was forged, rejecting what they called a masochist view of history — a border-crossing conspiracy aimed at the Japanese imperialist idea, “the oneness of the two nations.”
Korean to English: Are We All the Posterity of Dangun?
General field: Other
Detailed field: Social Science, Sociology, Ethics, etc.
Source text - Korean
[역사이야기] 우리는 모두 단군의 자손인가
한겨레21 제 344호/ 2001년 1월 31일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단일민족의 신화는 허상일 뿐… 그 의식 속엔 억압과 차별과 불관용이 숨어 있다

우리 사회에는 단일민족의 신화가 널리 퍼져 있다. 60, 70년대에 비해 조금 줄어들긴 했지만 우리 사회의 성원 모두가 ‘단군 할아버지’ 자손이라는 말은 아직도 흔히 들을 수 있다. 과연 우리는 ‘단군 할아버지’라는 한분의 조상으로부터 퍼져나와 혈연적으로 연결된 단일민족일까?
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단군의 아버지 환웅과 함께 이 땅에 온 3천의 무리나 단군이 다스렸던 백성들이 모두 아이를 낳지 않은 것은 아닐진대, 그들의 후손은 어디로 갔을까? 기자의 후손을 표방한 사람들의 도래에서부터 고려 초기 발해 유민들의 집단 이주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에서 대규모로 인구가 유입된 사례는 수없이 많다. 또 거란, 몽골, 일본, 만주족 등의 대대적인 외침과 한국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단군 할아버지’라는 한분의 조상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단일민족 의식은 하나의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종이를 꺼내 그림을 그려보자. 종이의 맨 아래에 나를 표시하고 그 위에 아버지, 어머니를, 그리고 각각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 어머니의 아버지, 어머니를 표시하는 식으로 그려보면 종이는 금세 꽉 찰 것이다. 대략 고려 말, 조선 초에 해당될 우리의 25대조 항렬로 거슬러올라가면 우리는 수천만명의 조상을 갖게 된다. ‘단군 할아버지’는 실존했다 하더라도 그분들 중 한분일 뿐이지, ‘단군 할아버지’라는 한분의 조상에서 오늘날의 한국인이 모두 퍼져나왔다는 것은 극단적 민족주의와 부계 혈통주의가 결합된 아주 난폭한 주장이라 할 수 있다.
고조선의 건국시조로서의 단군의 실체를 인정하는 것과 한민족 전체의 공통조상으로서의 ‘단군 할아버지’를 받드는 것은 엄청나게 다른 이야기이다. 각 성씨의 족보를 보더라도 자기 조상이 중국으로부터 도래했다고 주장하는 귀화 성씨가 적지 않다. 또 한국의 대표적인 토착 성씨인 김씨나 박씨를 보더라도 그 시조는 알에서 태어났지 단군의 후손임을 표방하지는 않는다. 이는 대부분의 족보가 처음 편찬된 조선시대 중기나 후기까지는 적어도 ‘단군 할아버지’라는 공통의 조상을 모신 단일민족이라는 의식이 별로 없었다는 증거가 된다. 또 엄격한 신분제가 유지된 전통사회에서 노비 등 천민과 지배층이 같은 할아버지의 자손이라는 의식은 존재할 여지가 없다.
공통된 조상으로부터 뻗어나온 단일민족이라는 의식이 처음 출현한 것은 우리 역사에서 아무리 올려잡아도 한말 이상 거슬러올라갈 수 없고, 이런 의식이 전 국민적으로 보편화된 것은 좀더 세밀히 연구해 보아야겠지만 신분제와 신분의식이 결정적인 타격을 입은 한국전쟁을 거쳐 1960년대 들어와서 일 것이다. 우리 역사에 처음 출현한 국가의 창건자로서 정치적인 군장이자 제사장적 성격을 지닌 임금을 가리키는 칭호였던 단군은 어느새 ‘단군 할아버지’라는 친근한 이름으로 우리 곁에 다가온 것이다.
제국주의의 침탈과 분단을 겪은 20세기에 단일민족의식은 민족의 단결을 고취하고, 신분의식 타파에 기여하는 등 긍정적인 역할을 일정하게 수행했다. 그러나 단일민족이란 실제 존재하지 않는 허상일 뿐 아니라, 단일민족의식이 역사의 발전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시기도 지나갔다.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는 단일민족을 내세우는 것의 순기능이 아직도 필요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특히 명백히 같은 핏줄에 한국어를 구사함에도 불구하고 피부색이 다른 이주노동자들보다 나은 대접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없는 조선족 동포들의 처지를 보면, 그리고 출신에 따라 편을 가르고 차별하는 지긋지긋한 지역감정을 떠올리면 같은 민족끼리 왜 이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갈라진 민족의 통일을 생각하면 우리는 한겨레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그러나 잠깐! 과연 단일민족의식이 이런 문제들을 극복하는 해답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지난 수십년간 단일민족임을 외쳐왔지만 이런 문제들은 오히려 더 악화되어 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2등신민’의 저주받은 유산
이제 우리는 좀 다른 식으로 생각해야 한다.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는 유감스럽게도 다른 민족이라면 차별해도 괜찮다라는 길을 열어두고 있다. 우리보다 앞서서, 우리보다 더 강하게 하나의 민족, 하나의 조국, 하나의 언어를 내세운 나치 독일은 600여만의 유대인 학살과 주변 국가에 대한 침략으로 나아갔다. 물론 이런 가능성들이 늘 현재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단일민족의식 속에는 분명 억압과 차별과 불관용이 숨어 있다.
이미 이 땅에는 50만에 가까운 외국 출신이 살고 있고 그들의 대부분은 이주노동자들이다. 19세기 후반 이래 우리나라를 떠나 외국으로 이민길에 오른 동포는 약 500만명.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 땅은 이주노동자들에게 자신의 태를 묻은 고향은 아니지만, 뼈를 묻어야 할 곳이 될 것이다. 그러나 단일민족의식이 살아 있는 한 이 땅은 이주노동자들, 짝을 찾지 못한 농촌 노총각들의 아내가 되어준 동남아 여인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발붙일 곳이 못 된다.
다른 인종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이중적이다. 우리는 모든 외국인에 대해서 배타적이고 적대적이지는 않다. 미국인 등 백인종에 대해서 우리는 한수 접고 들어가는 반면, 동남아나 아프리카 출신들, 그리고 같은 황인종인 중국인에 대해서는 못살고 더럽고 게으르다는 편견을 갖고 있다. 이런 편견은 19세기 말∼20세기 초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자들이 우리 민족에게 보인 편견의 재판인 동시에 인종간에 위계질서를 매기려 한 일제의 인종관의 잔재이기도 하다.
1930년대 이후 일본군국주의가 팽창을 거듭하면서 일본제국의 판도는 만주와 중국 일부를 거쳐 동남아 일대로 확대되었고, 일본제국 내의 인종적 구성도 대단히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아시아인에 의한 아시아의 건설’을 표방한 대동아공영권 논리를 내세우며 일제는 여러 인종간의 ‘협화’(harmony)를 강조했지만, 이 허울뿐인 협화는 각 인종집단간의 평등에 기초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일본인을 정점으로 각 인종집단간에는 뚜렷한 위계질서가 존재했고, 여기서 일본에 이어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하게 된 우리 민족은 ‘2등신민’(二等臣民)으로서의 온갖 참담한 ‘혜택’과 저주받은 유산을 떠안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지만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미개’한 조선인들에 대해 ‘동조동근’(同祖同根: 일본인과 조선인은 조상과 뿌리가 같다는 뜻)을 이야기하고, 일본식 이름을 갖는 것을 ‘허락’하고, ‘황군’에 참가하는 ‘은전’을 베푼 것도 다 ‘2등신민’만이 누릴 수 있는 ‘영광’이었다.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가장 쓰라린 상처의 하나인 일본군 성노예(‘정신대’) 문제 역시 일제가 우리에게 자기 마음대로 부여한 ‘2등신민’의 지위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일본군에 의해 성적인 노리개로 농락당한 여성들은 적게는 수만명, 많으면 20만명으로 추산되는데, 그중 80% 이상이 조선여성들이었다. 파렴치한 일제는 ‘차마’ 일등신민인 일본여성들을 잡아다가 그 짓을 시킬 수 없고, 그렇다고 ‘황군’ 병사들한테 ‘열등’한 인종 출신의 ‘질나쁜 성적 노예’를 공급할 수도 없었기에 ‘2등신민’인 우리의 누이들을 마구 끌고 간 것이다. 그렇게 끌려간 우리의 누이들은 ‘닛뽕진또 죠센진와 덴노헤이까 오나지네(일본인과 조선인은 천황폐하가 같지요)’라는 서툰 일본말을 외우며 옷고름을 풀 것을 강요당했다.

‘한겨레’라는 이름의 가치와 한계
우리는 20세기의 전반기에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인종차별의 설움을 쓰리도록 겪었다. 혹독한 시집살이를 겪은 며느리가 못된 시어미가 되는 것일까? 일제 잔재의 철저한 청산을 이루지 못한 채 분단과 전쟁에 휩쓸려간 우리나라에 미국식 백인우월주의가 들어오면서 ‘2등신민’ 의식이 살아남았기 때문일까? 쓰라린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우리는 우리보다 강한 자에게는 약하나 처지가 못한 자에게는 턱없는 우월감을 갖고 인종차별을 전가해왔다. 노근리 사건을 비롯한 한국전쟁 기간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 깔려 있는 인종멸시의 태도는 베트남의 정글에서 재현되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재일 한국ㆍ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는 이 땅의 이주노동자 등 피부색을 달리하는 사람들을 비껴가지 않는다. 동남아나 중남미로 진출한 한국기업에서는 일제시대 일본인 공장주들이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가한 민족적 멸시와 학대를 다시 볼 수 있다. 우리의 내면에 터를 잡은 백인우월주의는 어김없이 이민보따리에 묻어 태평양을 건너 본고장으로 역수출되어 한흑갈등의 주요인이 되고 있다.
이웃 일본에도 단일민족의식이 깊게 뿌리박혀 있고, 우리의 단일민족의식은 그런 일본을 상대로 싸우면서 서로 닮아간 측면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고려 중엽 이래 중앙정부에서 지방관을 파견해온 우리는, 중앙에서 파견되어 임기를 마치면 떠나야 할 관리 대신 봉건 영주가 대를 이어가며 자신의 영지를 다스려온 일본에 비해 민족공동체의 동질화가 더 오랜 기간에 걸쳐 강하게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대단히 강한 민족적 동질성을 기반으로 전개된 민족사는 그 자체로서 우리에게 소중한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지만, 인종주의 문제와 관련해 생각해보면 이는 불행히도 인종적 편견이 손쉽게 자랄 수 있는 온상이기도 하다.
민족적 동질성이 상당히 강한 사회와 단일민족사회는 엄청나게 다른 이야기이다. 단일민족사회란 사회구성원 중 소수자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말살해야 만들어낼 수 있는 위험한 사회이다. 우리가 단일민족이라는 허위의식을 내던져야 함은, 크레파스의 살색이라는 우스꽝스러운 말을 지워버려야 함은, 단지 우리 사회의 인구구성에서 1% 내외에 불과한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해서만은 아니다. 단일민족이라는 허위의식을 고집할 때 우리는 우리와 다르지만 동등한 인권을 가진 사람들을 박해하는 대열에 어느새 서게 되는 것이다. 이주노동자의 문제가 불거지기 전까지 우리는 단일민족이라는 말 속에 포함된 억압적 요소를 심각하게 고려하지 못했다. 1988년 이 처음 창간될 때 분단된 조국의 남쪽에서 살아온 우리는, 그리고 6월항쟁의 피땀이 지역감정에 묻혀버리는 것을 본 우리는 이라는 제호를 참 잘 지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역사는 늘 더디 흐르는 것 같지만 우리가 종래의 과제를 해결하기 전에 새로운 문제를 불쑥불쑥 내던지곤 한다. 단일민족의식의 흔적이 물씬 배어나는 이름을 지닌 와 이 어떤 매체보다도 열심히 이주노동자들의 문제를 알리기 위해 고투하는 것이 그 증거가 아닐까?
피부색 다르다고 왜 이리 못살게 구나
우리는 단일민족의 허상, 혈통의 순수성이라는 신화에 집착하지 말고 현실을 보아야 한다. 재외동포에 관한 법률을 보면 단일민족을 따지는 기준이 꼭 ‘단군 할아버지’ 자손은 아닌 것 같다. 이 법은 재외동포의 정의를 대한민국 국적을 가졌던 자 및 그들의 자손으로 규정하는 절묘한 조항을 삽입함으로써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에 이민을 떠난 재중동포나 옛 소련 지역에 거주하는 동포들을 재외동포에서 배제시켜버렸다. 이 몰역사적인 법률은 단일민족에 포함될 수 있는 재외동포의 필요충분조건이 결국 혈연이나 민족의식만으로는 부족하고 ‘돈’도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명백히 한민족의 구성원인 중국이나 옛 소련 지역의 동포들이 이런 대접을 받는 단일민족사회에서 이주노동자들의 처지는 참담할 수밖에 없다. 한국에 와서, 또는 한국에 오기 전에 이주노동자들이 제일 먼저 배우는 한국말은 “때리지 마세요, 욕하지 마세요, 우리도 사람이에요”라고 한다. 여기에 “월급은 왜 안 줘요?” 같은 말들이 실제로 이들이 사용하는 한국어 교재에 실릴 수밖에 없는 것이 단일민족국가 한국의 현실이다.
이주노동자들의 상당수는 불법체류자이다. 이는 우리의 출입국관리법이 그들의 법률 위반을 부추겨 불법체류자를 양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이 불법체류자라 해도 이들의 체류자격이 불법인 것이지 인권과 자존심까지 불법화된 것은 아니다. 80년대 후반부터 급증하기 시작한 외국인들의 노동이주가 1997년 말 외환위기 직후 잠시 주춤했다가 다시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경제가 이들의 노동력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런 엄연한 현실에도 출입국관리 당국은 이들에게 잘해야 3개월짜리 체류허가를 내줄 뿐 이들이 합법적으로 노동할 수 있는 자격을 주지 않는다.
이주노동자들의 숫자가 늘면서 이주노동자와 한국인들간의 국제결혼도 증가하고 있다. 최근 들어 국적법이 개정되기는 했으나 90년대 내내 우리 사회는 한국 남성과 외국인 여성의 결혼과 한국 여성과 외국인 남성 사이의 결혼에 큰 차별을 두었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 역시 차별을 받았다. 한국 남성과 외국인 여성 사이에서 출생한 자녀들은 바로 한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었지만, 한국 여성과 외국인 남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1999년까지 한국국적을 가질 수 없었고, 따라서 취학도 불가능했다. 이 문제는 현재 부모 중 한 사람이 한국국적이면 그 자녀도 당연히 한국국적을 취득할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되었지만, 한국 여성과 결혼한 이주노동자가 한국국적을 취득한다는 것은 여전히 사실상 불가능하다. 한국 여성과 결혼한 외국인 남성의 경우 합법 신분을 갖고 3년 이상 연속적으로 거주한 경우 한국국적의 취득이 가능하지만 3개월짜리 체류허가만 끊어주기 때문에 연속적으로 3년간 한국에 거주하는 길은 원천적으로 막혀 있다. 사위는 백년 손님이라는 전통 때문에 이들을 국민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인지, 아니면 단일민족의 순수한 혈통을 더럽히는 피부색 다른 사람들을 못 살게 굴자는 심사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단군’은 한때 민족주의자들의 지혜였지만…
이주노동자들의 역사가 깊어가면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는 2세들의 취학 문제이다. 그러나 어느 학교도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선례가 없다는 이유로 이 어린아이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극히 최근에야 성남에서 10여명의 몽골 어린이들의 등교를 허락했지만, 그들은 아직 청강생 신분일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외국인학교에 보내면 될 것 아니냐 말하지만, 사립초등학교 학비의 몇배가 넘는 외국인학교 학비를 댈 경제력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무엇하러 머나먼 이국 땅에서 3D 업종에 종사하겠는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단군을 내세워 민족의 구심점으로 삼은 것은 한말-일제 초기 진보적 민족주의자들의 지혜였다. 그들은 남의 땅에서 무기를 들어 군대를 만들고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쳤다. 단일민족 담론의 선구자들은 남의 땅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갖은 서러움을 겪어 본 사람들이었다. 피부색과 말이 다르다고 이 땅에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우리의 이지러진 모습은 과연 그들이 꿈꾸던 민족국가의 모습이었을까?
Translation - English
Are We All the Posterity of Dangun?
Behind The False Ideal of Ethnic Homogeneity Lies Intolerance, Discrimination, and Oppression against Foreigners

The false ideal of ethnic homogeneity is widespread in Korea. While not as frequent as in the 1960s and 1970s, we still commonly hear that we are the posterity of “Grandfather Dangun,” the legendary founder of Gojoseon (2333 BCE -108 BCE), the first kingdom of Korea. Then, are all Koreans really ethnically homogeneous, blood-linked with one another as his direct offspring?
The answer is no. According to the Dangun creation myth, Hwanung, a son of god and Dangun’s father, descended from heaven and became the ruler of more than 3,000 followers, and, in the same way, Dangun himself ruled his own people. If not all of them died without offspring, where are their descendants now? From the alleged arrival of the Han Chinese sage Gija and his followers in present-day Korea, to the mass migration of people from Balhae (an ancient Korean kingdom established in present-day Chinese territory) in the early Goryeo era (918–1392), there have been numerous cases of massive population inflows into the Korean peninsula. Also important are the massive invasions of the Khitans, the Mongols, the Manchus and the Japanese, and the scars left by the deployment of the U.S. army from the Korean war. Taking into account all these, we can say that the idea of an ethnically homogeneous nation, that we are all lineal descendants of Dangun, is no more than an old wive’s tale.
Take out a piece of paper and draw your family tree. Write down your name at the bottom, and your father and mother’s name above it. If you repeat the process, the paper will soon be filed with names of your ancestors. Tracing back to the 25th generation of all Korean ancestors who lived in the late Goryeo or early Joseon dynasty, their numbers will amount to tens of millions of people. Some might say that duplication inflated the number, but a rough calculation including those who lived in the Dangun era suggests an astronomical number of 2 to the power of 100 ancestors in the master Korean family tree. Even if Dangun did exist, he might have been just one of those numerous ancestors. The argument that all Koreans came from a single person, Dangun, is violent as it combines extreme nationalism and Koreans’ emphasis on the paternal blood line.
Acknowledging Dangun as the founder of Gojoseon is one thing, and commemorating him as the progenitor of the whole Korean nation is another. Many Korean families claim to have Chinese migrants naturalized in this land as their progenitors. Also the Kims or Parks, typical Korean aboriginal families rather claim that their progenitor came out of an egg, for example, but never claim that they are all descendants of Dangun. These facts all prove that at least until the mid Joseon to the late Joseon era, when most families began keeping genealogies, people hardly perceived Dangun as the single progenitor of the whole nation. Moreover, in traditional Korean society with its rigid class system, there was the slightest chance of people holding the belief that the lower class like servants and the ruling class share the same ancestor.
So the idea of a homogeneous nation appeared, at the earliest, during the era of the Korean Empire (1897-1910). We need a more thorough study to know exactly from when the idea started to spread among the people. However, it is assumed that it happened during the Korean war, which destroyed the traditional class system, and also in the 1960s. This was when the implication of Dangun, originally the founder of the first nation in the Korean history, and also the title of a lord who performed as a commander of the army and also a chief priest, was reduced to the friendly progenitor “Grandfather Dangun.”
In the 20th century, after the nation witnessed the atrocities of Japan’s imperialism and the division of Korea into North and South, the sense of a homogenous nation has played a positive role in promoting national unity and eradicating class discrimination. However, the idea of ethnic homogeneity, apart from being an illusion, can no longer produce positive effects. Some might say that it is still necessary to promote the idea to solve certain issues. It is especially so when we think of Korean Chinese migrants working in this country, whose position is no better than other foreign workers despite their language skills and ethnic background, or the implacable practice of dividing people into groups by region and discriminating each other. Furthermore, when we consider the unification of North and South, we are easily tempted to shout out: “We are one homogeneous nation!” But wait a moment. Is such a perception really the answer to these problems? We should remember that the cry of “homogeneous nation” for the past decades has not done any good to solve them.
The cursed legacy of being the “second-greatest” people
Now it’s time to change our mentality. The argument that it is bad to discriminate people of the same ethnicity means, in other words, that it is all right to discriminate people of other ethnic backgrounds. Nazi Germany, which was earlier in time and more enthusiastic in promoting the idea of one homogeneous nation, one country, and one language, ended up killing 6 million Jews and invading their neighbors. True, such things do not always happen, but the ideal of ethnic homogeneity can easily invite oppression, discrimination and conflict.
More than 500,000 foreigners are living in Korea, most of whom are foreign workers. In the late 19th century, around 5 million Koreans moved to other countries and never returned. The same story goes for foreign migrants. This land is not their birth place, but will be their place for burial. Since the sense of a homogeneous nation is alive and well, this land will give no place for foreign workers, foreign brides who traveled a long way from Southeast Asia to marry Korean farmers, and their children of mixed blood.
Korean racism is double-faced. We are not hostile or discriminating against all foreigners. While showing humble respect for white people like Americans, we harbor prejudices against Southeast Asians, Africans, and even the Chinese with the same skin color, considering them as poor, dirty, and lazy. However, this is exactly the way Koreans were judged in the late 19th to early 20th centuries by Japanese imperialists. Our racial prejudices are rooted in Japanese racism that invented their own racial hierarchy during the Second World War.
In the 1940s, after the expansion of Japanese militarism, Japan’s influence had reached to Manchuria, some part of China, and Southeast Asia, leading to a complex mixture of different races within its territory. Under the slogan of building “a bloc of Asian nations led by the Japanese and free of Western powers,” so-called the Greater East Asia Co-Prosperity Sphere, the Japanese imperialists emphasized “harmony” among different races. However, this ostensibly good idea was not at all based on equality of different races. With the Japanese on the top, each race was placed in a strict hierarchy, and Koreans, honorably positioned second to the Japanese, “enjoyed” all sorts of miseries and a cursed legacy as “benefits.” However preposterous the theory was, only “second-greatest” Koreans, although “unenlightened,” could have the “honor,” to be told “the Japanese and Koreans came from the same root,” to change their names in Japanese, and to enjoy “special favor” to serve in the “Emperor’s army.”
Japan’s sexual enslavement of Korean women (so called “comfort women”), one of the biggest tragedies in the nation’s modern history, is also closely linked with our position as the “second-greatest.” Among those women sexually abused by the Japanese military, whose number reached tens of thousands or up to 200,000 in total, 80% were Korean women. The despicable Japanese army chose to abduct our sisters and daughters, because they did not dare to capture Japanese women on the “top,” nor offer “the Emperor’s army” “unqualified sex slaves” from races at the “bottom.” The abducted Korean women were forced to undress, clumsily repeating the Japanese saying, “nipponjintto josenjinwa dennoheiga onajine [the Japanese and we Koreans serve the same emperor].”
The value and limitation of an ethnically homogeneous nation
In the early 20th century, the nation painfully suffered racial discrimination by the Japanese imperialists. Might it be that the victim is now seeking revenge? Or, might it be that, before fully removing the vestiges of the Japan’s colonial rule, the theory of being “second-greatest” was revived in the war-ravaged nation, thanks to the influence of American white supremacy? Failing to learn from the tragic past, we have perpetrated our own brand of racism, being hostile to the weak and generous to the strong. Civilian massacres that resembled those committed by the U.S. army like the No Gun Ri Massacre, which was resulted from racial disdain, was reproduced in the jungle of Vietnam by the Korean army during the Vietnam War. Our attitude towards foreign workers with different skin color in this land is no different from the ongoing discrimination and contempt against Koreans living in Japan. In overseas branches of Korean companies in Southeast Asia or Latin America, local employees often suffer the same kind of discrimination and harassment perpetrated by Japanese supervisors towards Korean workers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occupation. Packed in the mentality of Korean emigrants, the Korean brand of white supremacy even sailed across the Pacific Ocean and was reexported to the American continent, provoking conflict between Korean Americans and African Americans.
There is no denying that Korea’s sense of ethnic homogeneity has been reinforced through the history of fighting wars against Japan, which has long held a nationalist ideal of ethnic purity. However, Korea has a longer and more intense history of pursuing the idea of a homogeneous nation, because the nation has adopted the central government system since the mid Goryeo dynasty, with central governors sent to local provinces, as opposed to Japan’s feudal system in which the influence of feudal lords were limited within their own lands. Korea’s proud history, partly the result of its emphasis on ethnic purity, is in no doubt a valuable asset. However, it could also serve as a breeding ground for fascist racial ideology.
There is a huge difference between a society of ethnic solidarity and an ethnically homogeneous nation. An ethnically homogeneous nation can be only achieved by ostracizing or exterminating racial minorities. Now we should reject the false concept of ethnic purity, which is as nonsensical as the “skin” color in a set of crayons. Apart from making the effort to protect the rights of foreign workers, who make up only 1% of the nation’s population, it is much more important to be wary of unconsciously joining the group of racists by upholding the idea of ethnic purity.
Before the rise of foreign worker issues, oppression implied in the term “an ethnically homogeneous nation” had not been thoroughly considered. In 1988, when the Hankyoreh newspaper published its first issue, its name, which means “one nation,” appealed to many Koreans as they lived in the South of the divided nation and have also witnessed a regional divide among people after the 1987 June Democracy Movement, a nationwide protest against the military dictatorship of Park Chung Hee. But history, while its development is slow, always challenges our point of view bringing up with a new question. One proof might be that the Hankyoreh newspaper and Hankyoreh 21 magazine, whose names originally harbored the vision of ethnic homogeneity, are now at the forefront of the effort to make foreign workers issues known to the public.
The realities of having different skin color in Korea
We must break the illusion of ethnic homogeneity or ethnic purity, and see what’s really going on in this country. The current laws on overseas Koreans do not seem to grant all descendants of Dangun the status of Koreans. By slipping in provisions that limit the definition of overseas Koreans to those who once had Korean nationality or their descendants, the government has shut out Korean diasporas living in China or the post-Soviet countries, who migrated before the establishment of the Korean government. The failure of historical understanding implies that Korean diaspora should verify not only their ancestors and patriotism but also their wealth to be recognized as overseas Koreans.
In an “ethnically homogeneous” society where Korean diaspora, who are undoubtedly Koreans, have no status, foreigners working in this country are in no doubt under miserable circumstances. It is said that, before or after they come to Korea, they first learn how to say in Korean “Please don’t hit me, don’t curse me. We are humans, too.” That their Korean textbooks should include the Korean expression for “Where’s my paycheck?” reflects the bitter realities of Korea as an ethnically homogenous nation.
Most foreign workers are staying in this country illegally. This is because the current immigration control law has ironically reinforced their illegal stay. And their illegal status even makes their rights and pride they have as humans illegal. The inflow of foreign workers, which had sharply increased in the late 1980s until it hit a plateau in late 1997 because of the economic crisis, is on the steep rise again in the recent years. This proves that the Korean economy is in desperate need of foreign labor. Still, the immigration office issues three-month working visas only, banning them from working a legal and sustained job.
The large inflow of foreign workers has increased the numbers of international marriages between Koreans and foreigners. Until recently, before the nationality act was revised, the Korean government had discriminated against those who married Korean women, and their children also suffered discrimination. In contrast to the children born to Korean husbands and foreign brides, children from Korean mothers, not until 1999, could not acquire Korean nationality or go to public schools. Although now children to a Korean mother or father are equally endowed with Korean nationality, thanks to the recent amendment, foreign husbands still find it impossible to obtain nationality by just marrying Korean women. While the acquisition of Korean nationality requires three consecutive years of residence for foreign husbands, the three-month limit to their stay basically makes it impossible. Whether the treatment might be based on the Korean tradition of regarding a son-in-law as an important “guest,” or our warped desire to bully foreigners as those with different skin color diluting the nation’s pure blood, this is what is happening in this country.
The idea of Dangun as a single progenitor — once a nationalist wisdom
The long history of immigration has inevitably entailed concerns for educating children of foreign migrants. Still, Korean public schools are reluctant to accept them, saying that there are no related guidelines, nor successful cases existing. Recently ten Mongolian children were allowed to attend classes at a public school of Sungnam city, but not as enrolled students. Some say that they can go to international schools. But if their parents could afford the costly tuition for international schools, several times more expensive than for private schools, why would they have to do a dirty, difficult and dangerous job in a remote foreign country?
In the late Korean Empire and the early period of Japanese occupation, when the nation faced hard times, the concept of Dangun served a pivotal role in bonding Koreans together, thanks to the wisdom of progressive nationalists who spread the ideal of an ethnically homogeneous nation. Establishing in foreign lands the Korean Liberation Army and also schools to teach their children, they had to endure all kinds of discrimination and injustice as foreigners in a foreign land fighting for the nation’s independence. Would this country, in which foreigners are persecuted for having different skin color and languages, be the one they visualized in their minds as one free nation?
English to Korean: Automotive Market Insight
General field: Marketing
Detailed field: Automation & Robotics
Source text - English
The future of driving
We see vehicles evolving on two parallel tracks: first, advanced driver assistance systems
(ADAS) and the move toward autonomous driving; second, the adoption of EVs.

ADAS will be as essential to future drivers as seat belts
are to today’s. ADAS functions include blind spot
monitoring, collision warnings and traffic jam autopilot.
The spread of ADAS technology could pave the way
eventually for autonomous vehicles — cars that can
drive themselves. We see the evolution following that
tracked by seat belts, air bags and anti-lock braking
systems in past decades: ADAS features will move from
being options in high-end cars to standard features,
likely costing just a few hundred dollars — thus crimping
assemblers’ profits.
We illustrate rough estimates of when disruption
from ADAS-autonomous technologies may hit in
the Adapting to autonomous chart. We think of these
milestones as potential tipping points for pricing and
competitive dynamics, rather than forecasts for product
rollout. For example, we see the impact of adaptive
speed control already in force. Limited self-driving,
which allows drivers to hand over full control to the car
in certain situations, will likely gain in popularity through
the 2020s. The final phase of ADAS — autonomous
driving — is set to start rapid diffusion from the late
2020s, provided legal, ethical and other concerns
can be overcome (who is liable if a self-driven car hits
a pedestrian, for example).
Regulations are a key driver for innovation on power
train technologies. Take emission standards. The 2016
Paris Agreement on climate change aims to limit
the global average temperature rise to below 2 degrees
Celsius from pre-industrial levels. Global transport,
which has seen faster emission growth than other
sectors, needs to contribute one-fifth of the total
reduction of greenhouse gas emissions from energy
use in 2050 in order to help achieve the goal,
the IEA says. Tightening emission standards pushed fuel
economy of new cars globally up by 2% per year from
2005 to 2013, said the Global Fuel Economy Initiative.
Aggressive fuel economy standards and fiscal incentives
can deliver more fuel economy improvements,
the initiative also said.
The new US administration looks likely to relax fuel
economy rules, raising questions about the direction
of US regulation. Yet we do not expect any regulatory
changes to affect the shift toward EVs and autonomous
vehicles significantly. Many US states such as
California would likely fight to maintain tougher rules.
The rest of the world appears set to tighten fuel
economy standards further. And most importantly,
the trends we detail are primarily driven by innovation,
declining costs and safety concerns.
Diesel engines are under siege — and this could be an
impetus for EVs. Air pollution in some European cities
has prompted diesel vehicles bans. Car-makers are
facing growing regulatory scrutiny after scandals over
cheating on diesel engine emission tests. Without diesel,
it may be difficult for automakers in Europe to hit fuel
economy standards, raising incentives for them to speed
up development of EVs and charging stations.
Translation - Korean
오토모티브 시장의 미래
오늘날 오토모티브 기술 트렌드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첨단 운전자 지원 시스템(ADAS)의 발전으로 인한 자율주행 시대의 도래, 그리고 전기 자동차의 보급입니다.

미래 운전자들에게ADAS 기능은 오늘날의 안전벨트와 같은 필수 기능으로 자리매김할 것입니다. ADAS 기능에는 블라인드 스팟 모니터링, 충돌 감지 및 트래픽 잼 오토파일럿 등의 기능이 포함됩니다. ADAS 기술의 보급은 결과적으로 자율주행 (자동차 스스로 운전하는) 시대를 앞당길 것입니다. 지난 수십 년간 안전벨트, 에어백, ABS 시스템 등의 기능이 그래왔던 것처럼, ADAS 기능 역시 처음에는 고급 차량의 추가 옵션으로만 탑재되다가 점차 기본 옵션으로 자리잡게 될 것입니다. 수 백 달러의 추가 비용만으로 기능을 장착할 수 있으므로 이에 따른 조립업체의 수익률 악화가 예상됩니다.
ADAS 및 자율주행 관련 기술로 인해 자율 주행 시장 판도에 큰 변화가 일어나는 시점을 아래와 같이 대략적인 차트로 제시하였습니다. 차트상의 변곡점은 제품 출시의 예상 시점이라기 보다는 가격 결정과 경쟁구도에서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시점을 나타냅니다. 적응속도제어 기능의 영향력은 이미 체감할 수 있습니다. 차량이 특정 상황에서 스스로 주행 기능을 제어하는 부분 자율주행(Limited Self-driving) 자동차는 2020년대에 걸쳐 대중화 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ADAS 기술의 종착점이라 할 수 있는 완전 자율주행(Autonomous Driving) 자동차는 법적, 윤리적 과제를 비롯한 제반 문제가 모두 해결된다고 가정할 때(보행자를 쳤을 때 책임 소재 문제 등) 2020년 후반부터 확산될 것으로 보입니다.
환경 규제는 파워트레인 기술의 주요 혁신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먼저 탄소배출 기준을 살펴보겠습니다. 2016년 체결된 파리 기후협약은 지구 평균 온도의 상승폭을 산업화 이전 대비 섭씨 2도 이하로 묶어두는 것이 목표입니다. 국제에너지기구에 의하면 다른 산업계보다 탄소 배출량의 증가 속도가 가팔랐던 세계 수송업계는 2050년 기준 세계 탄소 배출량 총 감축 목표의 1/5에 해당하는 할당량을 감축해야 합니다. 또한 국제 연비 포럼(GFEI)의 리포트에 따르면 탄소배출 규제의 강화로 인해 2005년에서 2013년까지 세계 시장의 신차 연비가 연간 2% 향상되었습니다. GFEI는 높아진 연비 기준과 보조금 지원 혜택으로 향후 더 많은 연비 향상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내다보고 있습니다.
반면 새로 들어선 미 행정부가 연비 규제의 완화를 검토 중이어서 미국 내 규제의 향방을 예측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BII는 전기 자동차나 자율주행 자동차로의 이행 흐름에 큰 영향을 줄 만한 규제 변화는 없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규제 완화 움직임은 규제 수위를 유지하고자 하는 캘리포니아 등 대다수 미국 주 정부의 저항을 맞게 될 것입니다. 한편, 그 외 국가에서는 연비 기준이 지속적으로 강화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추이를 만드는 기본 원동력은 기술 혁신, 원가 절감 및 소비자의 안전 요구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한편 디젤 엔진이 진퇴양난에 빠지면서 전기자동차 확산에 자극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입니다. 대기오염 문제로 몇몇 유럽 도시에서는 디젤 차량의 운행이 금지되었습니다. 완성차 업계는 디젤 배출가스 테스트 조작 사건 이후 규제 강화에 직면한 상황입니다. 디젤 기술의 적용 없이는 연비 기준을 만족시키기 어렵기 때문에 유럽 완성차 업계의 전기자동차와 차량 충전소 개발에 가속도가 붙을 것으로 보입니다.

Translation education Master's degree - Graduate School of Translation and Interpretation, Ewha Womans University
Experience Years of experience: 5. Registered at ProZ.com: Dec 2017. Became a member: Dec 2017.
ProZ.com Certified PRO certificate(s) N/A
Credentials Korean to English (Ewha Womans University, verified)
English to Korean (Ewha Womans University, verified)
Memberships N/A
Software Adobe Acrobat, Microsoft Excel, Microsoft Word, Powerpoint
Bio
No content specified
Keywords: English, architecture, renewable energy, nuclear, Korean history, social science, sociology, ethics, art crafts, painting,


Profile last updated
Jan 4,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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