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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Kim

Sout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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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to English: The Two-sided Noir of a Single Incident
General field: Art/Literary
Detailed field: Art, Arts & Crafts, Painting
Source text - Korean
하나의 사실에 괸한 이중의 느와르


매일 밤 자리에 누우면 반짝이는 액정 너머로 이미지의 유성우가 쏟아진다. 해변가에 밀려와 폐사한 고래떼처럼. 오리온좌의 불타는 전함들처럼. 오늘의 철학자는 이미지의 운명에 관해 묻는다. 이미지는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그들은 어디로 가는가? 이 현상금 더미 주변을 서성이며 무언가 발견하려 애쓰는 일은 시각 과잉 시대의 한 가지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그런데—기억한다는 것이 어떤 이미지를 불러낼 수 있느냐의 문제가 되었다던 유명한 경구를 떠올리면, ‘많이 본다’는 것의 함의는 그리 간단치만은 않다. 최근 인스타그램과 텀블러의 타임라인이 구사하는 불가사의한 로직과도 비슷하게, 대체로 나는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내게 가까운 것을, 그래서 나를 투영하는 것을 본다. 더 끈적하게 밀착되어 투영된 것일 수록 기꺼이 나 스스로에게 발견된다. 요컨대, 내가 본다고 믿는 것은 투영된 나 자신이다. 이러한 새로운 응시는 가상화폐가 구사하는 블록체인 전략과도 유사해서, 무수히 많은 투영이 서로를 비추고 또 비추며 세계를 약속한다. ‘리얼’한 것들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듯한 거울의 미로에서 그 표면에 맺힌 이미지로 현현할 것이다. 여기서 나나 너, 주어들의 문제는 원시적인 애니미즘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나는 최소한 다음과 같이 적을 수 있다. 이미지가 어디에서 오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우리는 확실하게 이미지로부터 오는 것이 되었다고. 자, 나는 이 미로 바깥으로 달아날 수 있을까?

이강혁은 꽤 오랜 시간 다양한 군집으로 존재하는 서울의 예술/서브컬처씬을 찍어 왔다. 또한 어떤 측면에선 그 스스로 하나의 통로이자 생존자이기도 하다. “세계에 결박된 정서”를 “불특정한 대상이나 이미지-표면”으로 드러낸다는 그의 진술은 어느 정도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이 생존의 기록을 이른바 ‘도큐멘트’의 반대급부에서 ‘스냅’으로 환원하는 불성실한 관행에 대해 약간의 반감을 가지고 있다. 이강혁의 사진에선 스냅이라는 형식이 내용으로 확장(혹은 오인)되기 위해 취하는 가장 일반적인 전략—특정한 정서의 폭발이나 과잉이 아니라 오히려 차가운 정서적 결여가 느껴진다. 그가 바라보는 사건의 소실점은 날 선 긴장이 흐르는 화면 속 순간이 아닌 현장 바깥, 프레임 바깥을 향하고 있다. 보스토크의 편집인 박지수가 이강혁에 대해 “푹 익지 않은” “산도”를 가졌다고 쓴 것은 아마 비슷한 의미였을 것이다. 다만 이에 더하면, 그의 사진이 산미를 가진 것은 덜 익은 과일을 찍었기 때문이 아니라, 애당초 그것이 플라스틱 과일 모형으로 구성된 정물이기 때문일 테다.
이렇게 생각할 때 이강혁의 두 포트폴리오 와 연작이 맺는 관계는 보다 명료해진다. 수도권 변두리 일대의 밤 풍경을 찍은 가 흥미로운 점은 지난 시절의 회화가 그랬던 것처럼 풍경의 요소를 해체하고 그것을 순수히 광학적인 힘에 기대어 재구성한다는 점이다. 낮시간 레지스탕스들이 잔혹하게 소탕된 동굴에서 어딘가 정상이 아닌 밤의 요정을 조우하는 오필리아를 떠올려보라. 기예르모 델 토로의 영화처럼 이 판타지는 오히려 중증의 리얼리티를 소환한다. 아마 은 그 사건현장에서 발견되는 몇 가지 흔적—찌그러진 탄흔과 핏자국일 것이다. 이것은 발견보다는 소거의 작용에 가깝다. 무엇인가 살해된 프레임 속에서 우리는 신중한 법의학자로 분해 오리배와 하이힐을, 돌과 나무를, 시간의 순서가 뒤엉킨 흰색 토끼의 명멸을 본다. (사진의 증거능력에 관한 바르트의 말을 비틀면) 피해자의 유류품은 쉽게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되어, 익숙한 참조점을 제거당한 채, 현재의 나에게 도달한다.
사건의 긴 통로를 빠져나온 세계 너머는 어두침침하고 구체적이다. 이곳에는 아이디를 잃은 이미지들이 사려깊은 분열증 환자들처럼 도열해 있다. 이제 무엇이 우리를 증명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떤 이름으로 서로를 부를 것인가? 픽셀의 용량은 냄새도 촉각도 방향감각도 포함하지 않는다. 연결이 끊기고, 이미지가 깜빡인다. 회화적으로. 혹은 시적으로.

윤율리 / 아카이브 봄 디렉터.
Translation - English
The Two-sided Noir of a Single Incident

Images pass by like shooting stars over the liquid crystal display every night as I lay down to sleep. Like dead whales that have washed up on shore. Like attack ships on fire off the shoulder of Orion. The future of the image is a topic that is discussed vigorously by today’s philosophers. Where do they come from? Where do they go? The pursuit of such questions have become an obligatory task in a world oversaturated with images.
While it is said that to remember something is to conjure up a particular image in our minds, the implication that is made when someone is said to have ‘seen a lot’ is not at all that simple to pin down. Working under the same inexplicable logic behind the timelines created through Tumblr and Instagram, the act of seeing is mostly a selective process where we choose to see the images that we hold dear, which in turn are a reflection of ourselves. The closer the connection we have to the image before us, the more likely it is that we will find that same image in ourselves. Ultimately, what we believe to have seen in an image is really just our reflected selves. This new gaze is similar to the blockchain technology utlizied in cryptocurrency in that it creates a world of its own made up of myriad relfections layered upon one another. What is ‘real’ is all that manifests itself on the images reflected on the surfaces of the seemingly endless maze of mirrors. Such subjectivity, as you or I, is all but a primitive animism here. Although we do not know yet where images come from but we, for certain, can say that these images are what gave birth to us. Will I ever succeed in escaping its maze of mirrors?

Lee Kanghyuk has been photographing Seoul’s art and subculture scenes for some time. He is at the same time a survivor and a passage between the two scenes. In his own words, he is a photographer whose works reveal the “worldly(material) sentiments” through “ambiguous subjects and images”.
Because his works are often lazily categorized as ‘snaps’, I feel the need to clarify that his works are really the ‘documents’ of his survival. While snap photography captures explosions or the excess of certain emotions, Lee Kanghyuk’s works feel cold and lacking in emotive qualities in general. The vanishing point in his works lie outside of the scene, away from the incidents he captures and beyond the frame. This is most likely the reason why VOSTOK’s Park Jisoo wrote that his works have “unripe” and “acidic” qualities. But, in addition to Park Jisoo’s critique, I must say that the acidic quality found in his works are not there because he photographs unripe fruits but rather because the subject of his works are plastic models in the shape of fruits. With this in mind, the continuity that binds his two portfolios, and , can better be illuminated.
, capturing the nocturnal scenery of Seoul’s urban outskirts, is interesting because of the similarities it has to the works of past photographers in how the elements of scenery are deconstructed and reassembled by relying soley on the power of optics. Imagine Ofelia encountering the eccentric fairy of the night in a cave where resistance soldiers had been massacred earlier that day. Like the movies of Guillermo del Toro, this fantasy present in his works conjures a crucial reality in our minds. is like blood stains and shell casings left behind at a crime scene. It is more an erasure than a discovery. Something is murdered in frame and we, as forensic scientists, inspect the swan boat, the high-heels, the rocks, the trees; the flickering visage of the white rabbit while time itself coils and knots. The victim’s belongings, erased of all reference points, arrive at our feets in a form of a baffling riddle.
Through the long and winding path that is the unsolved case we arrive in a dark and specific place where images, without ID’s, are lined up with care like schizophrenic patients. What now, then, can be used to prove ourselves? What names will we give one another? There is no smell or texture in size of the pixel that makes up the image, nor does it point to a direction. Connections are lost. And the image flickers. Pictorially. Or poetically.

Yoon Juli / Director, Archive Bomm
Korean to English: Onymacrisunguicularis
General field: Art/Literary
Detailed field: Art, Arts & Crafts, Painting
Source text - Korean
오니마크리스운구이쿨라리스
이빛나

展은 차세대 여성들의 위반적이고 부정적인 정체성과 에너지를 시각 예술에서 발굴, 확인, 확장하기 위해 기획된 전시다. 전시 제목인 ‘오니마크리스운구이쿨라리스’는 검색이 가능한 지시 대상이지만, 검색을 하지 않으면 그것은 국적 불명의 외국어이기도 하고, 비밀의 주문이 되기도 하며, 여성이면서 남성일 수도 있는, 완전히 번역될 수 없는 존재로 무한 변신한다. 그러므로 오니마크리스운구이쿨라리스를 검색하는 것은 전시를 감상하는데 별 도움은 안 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진다. 전시를 구성하는 열 개의 작품은 오니마크리스운구이쿨라리스와 같은 변이체로서 그것들은 단독으로 존재하는 동시에 복수의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전시장 1층에는 오니마크리스운구이쿨라리스로 대변되는 불확실한 존재의 표면이 나열된다. 그 표면은 구체적이기보다 흐릿하고, 정지해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다. 작가 박수지의 영상 (2016)는 은밀한 꿈틀거림으로 존재의 ‘있음’을 알린다. 벽과의 구분이 애매한, 생물과 사물의 경계에 서 있는 존재는 온몸으로 자신의 언어를 전시장에 기입한다. 매 순간 사라지고 달아나는 무언가를 기록하는 그(것)는 보편이나 순리, 규범이나 체제에 의해 소거된 감각을 지금 여기로 불러들인다. 이러한 물성적 제스처는 그녀의 조각에서도 두드러진다. 영상 앞에 놓여있는 (2017)은 순수한 자연물이 아니라 레진, 실리콘, 우레탄, 점토, 폴리에스터 등이 합쳐진 인공물이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돌의 단단한 속성과 다르게 물컹하고, 끈적거리며 심지어 녹아내리기까지 하는 그것은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빛을 발하며 돌에 도달하지 못하거나 돌을 초과해 버린다.
비인(非人)적 형체는 작가 홍금양의 회화에서도 나타난다. 불이 환하게 켜진 집 앞 담벼락에는 치마를 걸친 두 다리가 빨래처럼 널려 있다. 너무 세게 몸을 던진 탓인지 담벼락에 균열이 생겼다. (2017)에 등장하는 ‘치마를 걸친 두 다리’는 여성을 상징하는 기호인 동시에 여성을 ‘연기’하는 자신을 폐기하는 자살 행위로도 읽힌다. 이처럼 ‘여성’이라는 규범에 저항하는 개체는 괴기스러운 이물감으로 제시되며 구원 없이 종결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고통스러운 신체는 작가 양유연의 회화에서도 발견된다. (2011)에 나오는 존재에게는 몸이 없다. 육중한 건물 위에 올라가 있는 얼굴은 밧줄에 매달린 채 무언으로 분노를 표하고 있다. 역시나 죽음을 연상시킨다. 문제적인 것은 이 두 작가의 작업이 적지 않은 시차를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묘하게 포개진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해방적 전복을 원하는 이들의 행위는 내일이면 망각될 사고로 치부되어 반복적으로 회귀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지난해 떠들썩했던 예술계 성폭력 사건뿐 아니라 상시적으로 발생하는 폭력에 기만당하는 여성 존재를 환기시키며, 무력할지언정 발언을 멈추지 않는 주체로서의 여성을 성찰하게 한다. 그러니 홍금양과 양유연이 택한 죽음은 삶으로의 귀환을 전제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알지 못하는 존재의 표면이 언제나 어둡고 묵직한 것만은 아니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벽면에 밀착된 작가 한지혜의 (2017)은 익살스러운 액션을 통해 존재의 발화를 시도한다. 주먹을 날리는 그/녀의 동작은 현실을 고통스럽게만 수용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하다. 이러한 주먹은 좁은 계단을 오르내리는 관객을 향하고 있다. 가상 공격인 줄 알면서도 관객은 몸을 움츠리게 된다. 이처럼 관객의 시선을 거칠게 잡아끄는 한지혜의 주먹질은 예정된 두려움, 미련, 불안, 실패, 좌절과 맞서며 뚜벅뚜벅 걸어가는 존재의 운동성을 보여준다.
주먹세례를 받으며 도달한 2층에는 오니마크리스운구이쿨라리스의 감각으로 형성된 세계가 펼쳐진다. 2층에 들어서자마자 관객을 맞이하는 것은 양유연의 (2017)이다. 희미하게 반짝이는 그것은 다름 아닌 유리 파편들이다. 깨진 빈 병의 흔적일 수도 있고, 창문에서 떨어져 나온 것일 수도 있으며, 공사 현장에서 굴러온 것일지도 모르는 그것들은 바닥이 아닌 허공에서 빛나고 있다. 작가는 일부러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밖에 없는 자리에 위치시키고, 관객이 그것을 감각할 수 있도록 충분한 여백을 마련해 놓는다. 이는 아래층에서 보았던 죽음의 ‘다음’ 장면일지도 모른다.
다시 도래한 존재는 홍금양의 (2017)에서도 만날 수 있다. 에서 보았던 갈라진 담벼락은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아무리 생각해도 거주는 불가능할 것 같은 그곳엔 낮잠을 부르는 해먹이 걸려 있고, 야자수가 자라며, 코코넛이 열리고, 자몽즙이 흐르며, 비둘기가 찾아온다. 이 낯선 풍경은 작가의 ‘유토피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그 유토피아 안에는 끔찍한 현실이 공존한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이곳의 삶을 견디기 위해 도피처가 될 만한 먼 곳을 절실하게 호출하고 있으나, 그 절실함만큼 이곳의 무게 또한 겸허히 수용하겠다는 태도를 내비치고 있다. 불행의 파편은 이렇게 ‘다른’ 감각과 결합하여 새로운 세계로 나아간다.
그러나 여기에는 새로운 세계의 구축이 이미 생활이 된 작가도 있다. 작가 차슬아는 멀쩡히 일상을 유지하다가도 돌연 방향을 틀어 현실을 이탈한다. 여덟 개의 채널로 이루어진 (2010-2017)는 내용과 형식을 따질 새도 없이 관객을 그 안으로 빠져들게 한다. 그러므로 그녀의 세계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자 적자면) 각각의 영상은 몇 십 초에서부터 삼분을 넘지 않는 짧은 분량으로 즉흥적이며 우발적인 상황을 포함한 일인극의 형태를 띤다. 쉽게 말하면, 그것은 ‘난이도 상(上)인 혼자 놀기’인 셈이다. 영상 속 행위자에게는 명징한 목적이 있으나 그것은 과정 중에 휘발되며, 기승전결이 없는 대신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쾌락이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상 속에서 차슬아를 찾는 일은 매번 흥미진진하다. 요컨대, 그녀는 제 스스로 존재 가능성을 조직하고 있는 중이다.
앞서 살펴봤듯이 전시의 배치구조는 ‘이접’이라는 관계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다시 말해 전시장 안의 모든 작업은 이웃해 있는 작업과 (긴밀하게 또는 느슨하게) 호응하며, 서로에게 덧대고 바라는 몸짓을 보여준다. 이러한 낯선 접합은 윈도 갤러리를 점유한 (2017)에서 정점을 찍는다. 그것은 미술인 손혜민과 문학인 임솔아의 협업의 결과물이다. 두 작가는 하나의 작업을 위해 자신들의 언어를, 즉 이미지와 문자를 교환하면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러한 작업을 단순히 이미지가 문자로 또는 문자가 이미지로 전환된 결과로 보는 것은 작업을 왜소하게 만드는 일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감정과 상태, 의미를 차츰 무화시키는 말을 담아내기 위해 (온전한) 이미지도 아닌 (가독성이 높은) 문장도 아닌 그사이 어딘가에 있을 제3의 것을 고안해낸다. 실로 처음 보는 대화법이다.
이렇듯 전시는 보편적 여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여성들, 그들의 움직임, 시선, 스타일을 제시함으로써 여성주의의 새로운 면면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여성‘들’을 위한 시각 예술의 확산을 도모하는 수행적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수행적 실천은 전시에 참여한 일곱 명의 작가들의 ‘말하기’로 발현된다. 그들은 오니마크리스운구이쿨라리스라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존재를 구현하기 위해 그것의 외피를 상상하고, 갖가지 표정을 새겨 넣으며 미지를 현실로 이동시킨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어느새 오니마크리스운구이쿨라리스라는 기표 밖에서 편견과 통념에 얽매이지 않는, 자신과 타자를 오가는 감각을 체험하게 된다. 전시는 바로 그 지점을 관객과 나누고 싶은 것이다. 그 무수한 결을 ‘같이’ 이야기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Translation - English
Onymacrisunguicularis
Bitna Lee

is an exhibition that excavates, reaffirms and expands the transgressional and pessimistic energy that emanates from female voices in fine arts. One could easily ‘google’ the words ‘Onymacrisunguicularis’, but without a precise definition its meaning is obscured. It is a thing of unknown national origin and of unknown gender. Its meaning unbeknownst to us, ‘Onymacrisunguicularis’ becomes an ambiguous entity undergoing constant transformation. This very ambiguity of the title leaves the exhibition open to myriad interpretations. The ten pieces that constitute the exhibition are constantly mutating entities like the title itself. They stand both independently and at other times collectively, letting their voices be heard.
The peaked surface of the uncertain entity that mirrors Onymacrisunguicularis is displayed on the ground floor of the gallery. That surface, while seemingly opaque and stationary, is in constant motion on closer inspection. Suji Park’s (2016) is a video that accentuates the ‘being’ of an existence through discrete wiggling motion. The entity, standing near indistinguishable from the wall, introduces its language into the gallery using its body. The video captures something that we have come to lose in the aftermath of systematic norms and universal laws. Such material gestures are also characteristic of her sculpture piece, (2017). It is an artifact composed of synthetic materials that include resin, silicon, urethane, clay and polyester. While the rock is a solid object the artifact is mushy, sticky and easily melts. It radiates with uniqueness, which makes it both less than and more than a mere rock.
Non-human figures can also be found in Keumyang Hong’s paintings. A pair of legs covered by a skirt are hanging on the wall surrounding a brightly-lit home. There is a crack on the wall, which seems to hint that the legs had collided into the wall with a considerable force. While the skirted legs featured in (2017) are a symbol for womanhood in general, it also alludes to the artist’s symbolic suicide in which she terminates her own womanhood that she had reluctantly been ‘acting’ out. In the painting the entity is depicted as an alienated and grotesque non-human figure doomed to suffer without hopes for salvation. The theme of the suffering body can also be found in Yooyun Yang’s painting, (2011). The painting depicts a bodyless head with an enraged expression. It reminds us of death. While the two paintings are 6 years apart from one another they show striking similarities in their themes. This is a recurring theme within the circle of female artists because it is this particular theme for woman’s liberation that is repeatedly brushed off and forgotten. Their current goal would be to reevaluate the role of women in art not only in relation to the recent disclosure of series of sexual assaults in the art scene, but also in relation to the victimization of women in general; the paintings are a window of introspection, a mirror for women who continue to speak out despite how fruitless it may be. The death portrayed by two artists are mere a premise for a return journey to life.
However the surface of the unknown entity is not always as bleak and ominous as the above pieces portray. On the wall of the staircase between the ground floor and the first floor is Jihae Han’s (2017). is an attempt in capturing the language of existence through humorous action. The punching motion of the figure in her work is the artist’s struggle against the bleakness of reality. The flailing arms of the figure in here work are aimed at the audience passing up and down the stairs. Despite being an imaginary attack, it will make the passerby flinch and cower. The raw and captivating punches illustrated here are brave strides toward the inevitable fear, emotional baggage, insecurity and failure in our lives.
On the first floor, through the barrage of punches, is a world rich with Onymacrisunguicularis sensibilities. Yooyun Yang’s (2017) greets the audience with the faint glimmer of the shards of glass. The glasses, wether they are broken bottles, pieces from a broken window or remains of a construction site, are sparkling mid-air. The artist brings the objects that are easily overlooked without close scrutiny to our eye level where they are unavoidable through the generous use of space. Perhaps this is the scene that comes following the ‘death’ in the ground floor.
Keumyang Hong’s (2017) is another piece dealing with the return and arrival of existence. The wall in is now barely there. Although it is not a space fit for livelihood, there is a hammock, a palm tree that grows coconuts, a grapefruit and a pigeon. This unfamiliar scenery could be the artist’s idea of a ‘utopia’. But within this imagined utopia coexists the horrors of reality. Here, the artist is conjuring her private haven from the everyday life while humbly accepting the weight of reality. Such fragments of misfortune integrates itself to ‘other’ emotions to spread forth into a new world.
There is an artist whose livelihood consists of constructing new worlds. Sla Cha is an artist who embed unexpected twists in her daily existence. Consisting of eight channels, (2010-2017) is a video that engulfs the attention of the audience regardless of its content and form. Attempting to ‘explain’ the artist’s world would be pointless. Each video is between 10 seconds to 30 minutes in length. Most are sort of a spontaneous and improvised monodrama where the artist is in solitary play but on a much more elaborate level. The performer in the video has a clear goal but during its process the goal is quickly discarded and despite the lack of a well-planned plot, it is joyous to watch in an unanticipated way. Finding the artist in the video is a compelling process every time. She is orchestrating the possibilities of her existence.
The arrangement of the installation in the exhibition have a ‘disjunctive’ quality. In other words, all the pieces on display are either intimately or loosely responsive to their adjacent works in that they are co-dependent and crave one another. This peculiar juxtaposition reaches its peak in (2017), displayed on the window gallery. The installation is a collaborative effort between the writer Sola Lim and artist Hyemin Son. The collaboration took place as a form of dialogue of their respective languages, words and image. But to view the installation as the translation of words into images, or vice versa, is a serious understatement. In (2017), they devised a third medium, neither legible words nor complete images, to slowly annihilate the sensations and conditions that cannot be explained logically. It presents to us a new dialogic method.
The exhibition explores the many faces of feminism through the performative practice of motions, perspectives and styles of women who refuse to be holed into the typical notions of womanhood and in turn expands the methods of approach available for women in fine arts. Such a performative practice is manifested through the ‘dialogue’ between the seven participating artists. By imagining its appearance, portraying its many faces and breathing life into the unknown entity of Onymacrisunguicularis, they have quickly moved on beyond its boundaries to experience a sensation that is exchanged between themselves and others free from social prejudice and conventions. The exhibition aspires to share such sensations with its audience and to provide a forum in which we can converse with one another.

Experience Years of experience: 9. Registered at ProZ.com: Dec 2017.
ProZ.com Certified PRO certificate(s) N/A
Credentials N/A
Memberships N/A
Software Adobe Photoshop, Powerpoint, SDL TRADOS
CV/Resume CV available upon request
Bio
Name: Robert Ueisung Kim
Contact: [email protected] / +821044594622

I am a Korean-Kiwi with five years of experience in providing quality Korean and English translation. During my career I have worked on a wide variety of projects some of which include the following:

- Translation for webcomics at Lezhin.com("An Eye for an Eye", "Reveries of the Moonlight")
- Subtitling for various independent films and international film festivals("No Money, No Future", SICAF)
- Translation for product descriptions on Gmarket's English webpage(fashion, cosmetics)
- Translation for art exhibition catalogues("Snakepool", "Onymacrisunguicularis")


Profile last updated
Dec 29,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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